Something Special

Che Guevara와 Che Sara의 관계 :2007.6.11

Indiankoko 2018. 2. 1. 12:05

체 게바라(Che Guevara)와 케 사라(Che Sara)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ㅎㅎ
케 사라는 체 게바라의 여동생이 아닙니다.
혹시 그럴 수도 있겠다싶어
인터넷 검색했습니다.
그러다가 체 게바라의 됨됨이가 너무 인간적이어서 아예 복사해 와서 
여기에 그의 됨됨이를 올립니다.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케세라 음악과 함께 이 글을 올립니다.
가사의 내용이 어찌보면 그의 마음을 노래하는 듯 합니다.
송원섭님의 덧글 덕분에 체 게바라를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체 게바라 (Che Guevara), 

그는 누구인가..?



'All Right, Let's Get the Hell Out of Here'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출생의 쿠바 정치가·혁명가. 체 게바라로 불린다. 멕시코에 머무르면서 쿠바혁명에 참가하였다. 볼리비아 산악지대에서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여 활동하다 붙잡혀 총살당했다. 

체 게바라 

1928년 아르헨티나에서 태어나 1967년 볼리비아 산골에서 처형당할 때까지 39년간 그의 생애는 파란만장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파란만장한 만큼 그의 인간과 생애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미 제국주의에 항거한 그의 족적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로만 그를 규정하기에는 부족함이 있다. 한마디로 그는 하나의 특징으로 유형화되지 않는 사람이다. 의사, 고고학자, 시인, 언론인, 혁명 후에는 쿠바국립은행의 총재를 지냈을 뿐 아니라, 아마추어 사진사였고 베레모에 군복을 입고 골프를 치면서 시거를 즐긴 사람―이 혼돈스러울 정도의 다양한 유형의 원천이 어디에서 오는가는 사람들의 끈질긴 의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양함은 하나의 원천에서 발현된다. 날카로운 이성과 기민한 행동과 따뜻하고 낭만적인 꿈도 '인간'이란 절대 절명의 명제 앞에서는 하나로 통합되고 만다. 

장 코르미에는 "그는 다양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 다양성은 항상 일관되게 '우리'를 향해 있다"고 쓴다. 게바라 자신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진정한 혁명가는 사랑이라는 위대한 감성에 의해 인도된다. 이 특징이 결여된 진정한 혁명가를 상상할 수는 없다." 




프랑스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칭송한 바 있지만 오히려 그는 가장 성숙한 인간이 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고 추구했던 사람이라고 나는 표현하고 싶다. 그리고 그 끊임없는 갈망의 원천은 세계와 인간에 대한 신뢰와, 신뢰를 이룩하고자 하는 열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체 게바라를 혁명가로 만든 것은 '꿈'이라는 키워드가 담보하는 것만큼 ?결코 낭만적이지 않은 현실?이었다. 


<상당한 애연가였나 봅니다.>


탄생과 전환 

1928년 6월 14일 아일랜드계 할아버지와 바스크계 할머니의 피를 이어받은 체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파라나 강 배 위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세르나였다. 체의 집은 부유한 편이었지만 동네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여덟 살 때부터 체는 굶주린 광부나 호텔 노동자의 아이들을 집으로 데려왔고 그의 집은 곧 ?비베 코모 키에라스?(원하는 대로 지내는 곳)라는 별명으로 불리웠다. 이때부터 체는 일생동안 흠모했던 파블로 네루다의 시를 암송하기 시작했고 부르주아의 아들로 안주하기보다는 도시 변두리의 바라크 집 아이들과 어울렸다. 

체 게바라가 의사가 된 동기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두 살 때부터 천식을 앓았던 체는 훌륭한 의사가 되어 당시만 해도 뚜렷한 치료법이 없었던 천식의 치료법을 개발해보려는 희망을 품기도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상상력 풍부하고 연민 많던 그의 성격이 의사의 꿈을 키워갔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부유한 아르헨티나의 중류 생활에 젖어있던 게바라의 인생은 의과대학 시절 여행을 통해 전환점을 맞는다. 늘상 찾아오는 천식 발작에도 불구하고 운동과 모험을 즐기던 게바라는 연상의 친구 알베르토와 함께 수시로 고장나는 중고 바이크를 타고 라틴 아메리카를 여행한다. 비탄과 비에 젖은 라틴아메리카―대지는 게바라에게 두 가지 깊은 인상을 남겼다. 감수성 예민한 청년 게바라는 아름다움과 비참함이 공존한 라틴아메리카의 대자연과 민중들의 비탄스러운 삶을 가슴깊이 호흡했다. 




한번은 하루 수백 만 달러의 이익을 거둬가던 미국인이 운영하는 광산을 둘러보다가 게바라는 광산의 노동자용 공동묘지에 이른다. 거기에는 사고로 죽은 인디오들이 묻혀 있었다. 게바라가 안내인에게 물었다. 

"얼마나 묻혔나요?" "대략 만 명 정도?" "그럼, 미망인들과 자식들은 어떤 보상을 받았나요?" 

질문을 받은 광산 안내인은 어깨만 으쓱했다. 그때 친구 알베르토는 게바라의 눈에서 번뜩이는 불꽃을 보았다. 박탈당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그 피와 땀을 빨아 마시는 이들에 대한 증오가 담긴 눈빛이었다. 그러한 현실 앞에 몸을 떨었던 그는 그 소름끼침만큼 라틴아메리카와 그 땅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당시 산파블로에는 나병환자들이 많았다. 여행을 계속하던 두 사람은 나병 환자촌에서 열 하루 동안 머물렀다. 그들이 떠나는 날 비가 내리는데도 환자들은 환송파티를 준비했다. 환송노래와 함께 세 사람의 환자 대표가 감사의 연설을 마칠 때쯤 청년 게바라는 울고 있었다.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게바라는 이렇게 썼다. 

"작별인사를 하기 위해 환자들이 악단을 조직했습니다. 아코디언을 켜던 사람은 오른 손 손가락이 모두 없었는데 손목에 막대기를 고정시켜 손가락을 대신했답니다. 노래를 부르던 사람은 앞을 못 보는 장님이었고....이 장면이 저에게는 이제까지 보았던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의 하나로 남을 것입니다" 

그는 그런 인간이었다. 제국주의와 부르주아 계급에게 수탈 당하고 있는 인디오와 메스티조들의 삶을 목격한 그는 꿈꿔왔던 의사의 길 대신 게릴라 투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여행 중 우아이야나픽추 정상에 오른 게바라는 아마도 제목이 [마추픽추]였을 네루다의 시를 큰 소리로 암송하며 전율을 느낀다. 라틴아메리카와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 대한 그의 타오르는 사랑은 그로 하여금 총을 들고 싸우게 했다. 

"우리에게 한 자루의 총을, 우리에게 뜨거운 사랑을" 

오지에서 총살당한 영웅은 늘 그렇게 외쳤다. 




살아남은 게릴라 

1955년 7월 멕시코에서 피델 카스트로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있은 후, 그는 미국의 압제에 신음하는 남미 대륙을 구해내기 위해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게릴라 활동을 벌이며 혁명군을 모았다. 1956년 11월 26일 단 82명으로 구성된 쿠바 해방군은 툭스판 강을 따라 출발했으나. 한달 쯤 후인 12월 23일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체포 후 처형당하고 단 열두 명만이 남았다. 그들은 거대한 협곡들로 이루어진 산악지대 시에라마에스트라에 게릴라 진지를 구축했다. ‘문명이란 단지 막연한 희망에 지나지 않는'곳이라고 장코르니에가 표현한 그 오지에서 출발하여 게바라와 카스트로는 쿠바 인민의 해방을 성공시켰다. 

거의 3년 동안 정글의 독충에 온몸을 뜯기고 온갖 병에 걸리는 뼈를 깎는 전투를 지속하면서도 그들이 해방을 성공시킨 중요한 요인들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단 12명이 어떻게 수만의 군대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일까? 그들은 그들이 해방시키고자 했던 민중들을 믿었고 또 그들을 존중했기 때문이라고 나는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다. 투쟁 동안 정부군도 해방군에 투항해왔다. 

"포로들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가 정부군의 태도와 대조됐다. 정부군은 부상당한 포로는 물론이고 자기편까지 버리고 가는 일이 흔했다. 이런 차이가 승리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인간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자세는 그렇지 못한 상대편을 와해시키는 가장 중요한 핵심 전략이었다―전략이라고 말하면서 나는 게바라에게 죄송함을 느낀다. 게바라는 전략으로 민중을 사랑하지는 않았다. 가슴깊이 그는 민중을 믿었고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목숨 바칠 각오를 할 것인가? 

그들에게 전투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농민들이었다. 자발성과 진지함과 지성이 필요한 이 일에는 의사인 게바라만큼 적임자는 없었다. 체는 농민들을 금방 자기편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의 가슴에 호소하는 능력’을 지녔다. 1957년 체의 기록에도 그렇게 적혀 있다. 

"우리는 정부군이 민간인들에게 행하고 있는 갖은 만행을 징벌하고 제지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그런 그들을 향해 농민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고 생사의 위험 앞에서도 농민들은 카스트로와 게바라들을 지원했다. 



승리와 최후 

1959년 1월 쿠바 산타클라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에 입성한다. 당시 게바라는 이견 없는 2인자였다. 그러나 혁명을 성공시킨 게바라는 보장된 2인자의 자리를 내던진다. 쿠바 국립은행총재 재직 당시 사탕수수 밭에서 노동하면서 ‘실천하는 지도자’의 강한 인상을 심었던 그가 선택한 삶은 또 다른 고난의 길―아프리카와 남미에서의 목숨을 건 게릴라 활동이었다. 권력의 자리를 미련 없이 버리고 남미 혁명의 소용돌이에 뛰어든 그는 1965년 내전 중인 콩고를 거쳐 볼리비아로 건너갔다. 

자본주의를 비난하고 미국을 향해 총을 들었지만 그는 인간을 도외시하는 어떤 특정한 이데올로기도 신봉하지 않았다. 게바라는 국제 정세상 어쩔 수 없이 손을 잡았던 사회주의 국가의 맹주였던 소련을 향해 "어떤 점에서는 사회주의 국가들도 제국주의적 착취에 일조를 하고 있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하고 "사회주의는 성숙되지 않았다. 그 안에는 많은 오류가 담겨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는 쓰고 있다. 

"혹시 우리에게 마르크스주의자인지 아닌지를 묻는 것은 물리학자에게 뉴턴주의자냐고 묻는 것이나 생물학자에게 파스퇴르주의자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사실 인간들의 지식에 너무도 깊숙이 침윤되어 있어 이견의 여지조차 없을 만큼 익숙한 진실이 있게 마련이다" 

그가 말하는 익숙한 진실이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실이며 그러한 민중을 수탈하는 세력에 대한 항거였음을 재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혁명의 성과를 즐기는 기득권 층 일수 있었던 그는 다시 전선에 뛰어들었다. 그가 꿈꾸는 민중의 해방은 결국 제3세계의 거대한 연대를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그는 판단했다. 그리고 그 목적을 위해 세계 곳곳의 피압박국가나 민족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믿었던 그는 그의 삶이 다하는 날까지 혁명과 해방을 위해 자신을 불태웠다. 미래에 대한 이처럼 엄청난 게바라의 낙관은 민중에 대한 애정과 신뢰에 기초했고 그것은 바로 게바라를 움직이고 살게 하는 핵심 동력이었다. 




그러나 볼리비아는―아니 볼리비아 민중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사실은 쿠바의 성공과 비교할 때 중요한 표석이 된다. 이유는 단지 볼리비아 인민의 무지와 공포 때문이었다. 

쿠바에서 싸울 당시 게바라는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학교를 세우고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쳤다. 게릴라의 부대는 대부분 문맹자였지만 "글자를 모르면 왜 총을 잡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그는 가르쳤다. 총을 잡는 이유를 모르는 투쟁은 진정한 투쟁이 아니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만큼 ?학교?는 게바라에게 그 어떤 요새보다 중요했다. 그는 시거를 달라고 요구하는 문맹 게릴라들에게 서면으로 요구하라고 말한다. 문맹 게릴라는 결국 담배를 피우기 위해 글을 배워야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볼리비아에서 글을 가르칠 여건도 되지 못했고 결국 볼리비아 민중들은 이 이방인이 싸우는 이유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다. 민중의 지원이 없는 곳에서 게바라는 날개 잃은 새처럼 지치고 연약했다. 


1967년 10월 8일 볼리비아 정부군에 의해 총상을 입은 채 생포된 체 게바라는 다음날, 이름 없는 작은 촌락의 학교에서 사살된 후 양손을 잘리우고 불태워진 채 유기 되었다. '무릎 꿇고 살기보다는 서서 죽는다'고 했던 전사 체 게바라의 최후였다. 




그가 남긴 멧시지 

인간만을 믿으며 늘 새로운 것을 추구했던 체 게바라. 1956년 멕시코에서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한 구절은 39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한 그의 진면목을 엿보게 한다. 

"저는 예수와 전혀 다른 길을 걷고 있습니다. 저들이 나를 십자가에 매달아두게도 하지 않을 것이며 어머니가 바라시는 방식으로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어머니가 바라는 방식이란 아마도 사랑과 온유함의 길이었음을 우리는 짐작할 수 있다. 분명 그는 예수가 간 길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길은 수많은 수탈당한 주검들을 묘지에 묻어버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조차 무관심한 척박한 땅에서는 통용될 수 없는 길이라고 그는 판단했을 것이다. 묘비도 없이 죽은 ‘비천한 자’들을 위해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란 총을 들고 싸우는 길이었을 것이다. 

네 자녀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에서 그는 또 말한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너희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 혁명가가 가져야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가장 아름다운 자질―게바라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누군가 연약한 사람들에게 행해질 불의를 깊이 깨닫고 그걸 걷어내는 일이었다. 

목숨을 던질 만큼 뜨겁게 민중을 사랑하면서 불의에 철저히 항거하기 위해서는 자신과 동료들에 대해 그 누구보다 엄격했던 게바라의 진지함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어진다. 냉전 체제가 끝나고 혁명의 열기가 역사의 뒷전으로 물러났어도 나약한 민중들의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그의 열정은 사람들 가슴속 어딘가에 새겨져 있을 것이다. 

단 한번이라도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질문으로 고뇌해 본 적이 있는 모든 사람들 앞에 
눈을 뜨고 죽은 그의 시신 사진이 던지는 
강열하고 무서운 질문은 아마도 이러할 것이다. 

"네가 목숨 바쳐 싸워야 할 진실은 무엇이냐?" 라고. 

그러나 그의 또 다른 외침 중에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냉철하고 
열정적인 답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 속에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불가능한 꿈'이란 어휘가 지니는 비장감은 그러나 그의 생생한 삶을 통해 또 다른 ‘가능과 희망의’ 불을 지피고 있다. <이상 본문은 엠파스에서 퍼 옴>



Amore mio ti bacio sulla bocca, 
che fu la fonte del mio primo amore
ti do l'appuntamento come e quando non lo so, 
ma so soltanto che ritornero'.

Che sara' che sara' che sara', 
che sara' della mia vita chi lo sa,
con me porto la chitarra 
e se la notte piangero'
una nenia di paese suonero'. 

엇이 올까나, 무엇이..
무엇이 길 떠나는 내게로 올까나...
나의 사랑하는 여인아 나를 기다리고 있어라 
정녕코 고향으로 돌아오리라

사라 케사라 케사라 
케사라 데라미아 기타 길로사
소만 뚜따 호 세미안때 라소 바미 길로사 
케사라 사라 퀠 케사라



  
칸소네, Che Sara는 
1971년도 이탈리아 산레모 가요제에서 
우리에겐 
Sara Perche tiamo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그룹 
Ricchie Poveri와 JoseFeliciano가 
함께 불러 2위에 입상했던 노래 




  •  도돌돌
    나를 기다리는 여인아 좀더 기다리고 있어라. ㅎㅎㅎ 2007.06.11 20:24 | 삭제 | 덧플
    • 코코
      ..................(아무도 대답하는 이 없음).....ㅋㅋㅋ 2007.06.12 14:27 수정 | 삭제
  •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2007.06.11 21:48 | 삭제 | 덧플
  •  빈손
    한때 체게바라 평전이 젊은이들의 필독서일때가 있었지요. 그런데 지금와서 생각하면, 별로 영웅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바가 어떻든지 결국은 교묘한 통제와 억압이었고 자신은 자유로웠지만 그 아래 하수들은 전혀 다른.... 그래서 혁명가들의 삶이 성공적이지 못하였던 것 아닌가 생각됩니다. 혁명가들이 누가 있나? 박정희, 김일성, 티토, 카스트로, 모택동, 레닌, 스탈린..... 2007.06.12 08:33 | 삭제 | 덧플
    • 코코
      "난 사람들과 함께 섬으로 갈 겁니다. 양반과 상놈이 없고, 착취도 없는 곳. 모든 사람이 서로를 아끼며 평등하게 사는 섬으로 말입니다."...영화 황진이에서 황진이가 사랑한 혁명가 '놈이'의 대사입니다. 그밖에도 무혈의 혁명가 간디, 획일성에 반기를 든 다양한 사상의 소유자이며 홍길동의 저자인 혁명가 허균, .... 2007.06.12 14:45 수정 | 삭제
    • 코코
      ..심지어는 예수님도 그 당시의 사회 모순에 반기를 든 혁명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체 게바라는 전자의 빈손님이 든 예의 인물들이라기보다 후자쪽이 아닐런지요...? ^^ㆀ 2007.06.12 14:48 수정 |삭제
    • 빈손
      후자들은 혁명가라는 단어를 붙이기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창조적 개혁론자가 아닐까요? 사실 혁명의 의미가 너무 넓기는 하지만 관념상 혁명가라면 기존의 헌법질서 일부가 아닌 통째로 파괴하고 새로운 질서를 세운 사람들이 아닐까요? 예수님을 혁명가로 보는 것은 아주 극단적인 시각입니다. 김동리의 사반의 십자가로 대표되고 또 근자에 유명한 베스트셀러 책이 있었는데 깜빡 기억이 나 2007.06.13 09:16 삭제
    • 빈손
      지 않지만.... 그러한 책들에서는 예수님을 인간적인 사회학적 측면에서 접근한것 같습니다. 이를테면 열혈당원들이 예수를 왕으로 세우려고 시도하였던 일이나 마리아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나 전부 사회학적으로 접근을 시도한 것일뿐 맞는 것은 아닙니다. 2007.06.13 09:19 삭제
    • 빈손
      열혈당원들이 중심이 되어 예수를 왕으로 옹립하려고 하였지만 예수는 그것을 거부하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입니다. 간디나, 허균등은 혁명을 꿈꾸었는지는 몰라도 저는 창조적 개혁지향주의였다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2007.06.13 09:23 삭제
    • 코코
      ...빈손님...긴 덧글에 뭐라고 대답할 말을 잊었습니다. 전 체 게바라에 대해 빈손님만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몸으로보여준 행동이 너무 인간적이라는 것...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잘 모르지만 그에게서 느껴지는 뭔가가 저를 매료시키는군요...말로만 떠드는 우리 범인들관 많이 다른 듯하지만... 2007.06.13 13:24 수정 | 삭제
    • 코코
      어쩌면 제가 알지 못하는 그의 또 다른 면이 있을 수도 있겠지요. 전 그냥 제가 아는만큼의 그를 좋아하고 싶습니다. 혁명가...언어 자체에서 오는 강한 뉘앙스가 있는데 전 그를 혁명가라고 부르는 대신 걍 "따뜻한 남자"로 부르고 싶습니다. ^^ 2007.06.13 13:30 수정 | 삭제
    • 빈손
      ㅋㅋㅋ 이렇게 까지 심각할 필요는 없을것 같습니다. 그냥 제가 촐싹댄 것입니다. 아무 뜻도 없습니다. 다만, 참고로 말씀드리면, 저는 게바라 같은 인물 존경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이 성공적이었다거나 그러지도 않습니다. 다만 저의 생각일 뿐입니다. ㅋㅋㅋ 2007.06.13 17:36 삭제
    • 코코
      아...시인 라헬님,....님의 시를 한 편 소개해주실래요..?^^ 2007.06.12 14:49 수정 | 삭제
    • 코코
      잘 보고 왔습니다..(무쟈게 어렵넹 ㅋㅋ )암튼 라헬님의 게바라의 사랑은 대단하시군요,^^ 2007.06.13 13:34수정 | 삭제
  •  송원섭
    절대 남매일 수가 없는게 일단 che가 이름이 아니라 '동지'라는 뜻이죠. 이렇게 장문의 글까지...^^ 2007.06.12 10:36 | 삭제 | 덧플
    • 코코
      che가 '동지'라는 사실...지금 알았습니다. 아,,,,이 무식함의 끝은 어디일런지요...?^^ 2007.06.12 14:50수정 | 삭제
  •  서티9
    ㅋ..잘 읽었습니다..노래도 잘듣구요!!..^^ 2007.06.12 21:22 | 삭제 | 덧플
    • 서티9
      che 동생노래..빌려감다!!..^^ 2007.06.12 21:26 삭제
  •  알프
    한때는 저두 반했던 인물입니다...관심을 두고 이사람에 대한 여러 글들을 읽다보니...
    역시 여러시각에서 보는 서로 상반된 체게바라가 나오더군요! 뭐 당시 그와 끝까지 투쟁했었다고 주장하는 인물들이 그를 제가 알고 존경했던 그가 아닌 사람으로 표현하는글을 읽고 조금 거리를 두고 이사람을 조명해 보았읍니다.....하긴 아무것도 아닌 알프같은 이도 좋다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으로 나뉘니.....^^;; 2007.06.13 11:13 | 삭제 | 덧플
    • 코코
      사실 전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어 드릴 말씀이 없군요...게바라에 대해 제가 모르고 있는 부분이 많기 때문이지요..암튼 위의 글로 보았을 때 그는 좋은 사람이란 생각이...ㅎㅎㅎ 2007.06.13 13:37 수정 | 삭제
    • 코코
      코코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거구 싫어하는 사람도 있을거구...모든 것은 상대적이라 할 수 있죠.^^ 2007.06.13 13:39 수정 | 삭제
    • 알프
      엇...코코님 ...화나신거 아니죠?
      그냥 제 생각인데....신경쓰지 마셔요^^ 2007.06.13 17:40 삭제
    • 코코
      화나다니요? 화낼 이유 전혀 없답니다, 알프님.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게바라에 대한 진실에 확신이 없는 사람이랍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 지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않아요...무식이 탄로나는 순간입니다.크흐~~^^;; 2007.06.13 21:18 수정 | 삭제






조용한, 진정한 또 하나의 Che Guevara


방금 제가 최근에 올린 글, http://blog.joins.com/meg123/8123728에 대한 빈손님의 덧글을 읽고 
또 답글을 달면서 많은 걸  생각했습니다.

빈손님이 진정 말씀하시고 싶은 게 뭘까..하구요.
그리고 암부강님의 방에 와서 나름의 답을 찾았습니다.
바로 위의 글을 읽으면서 말입니다.

이 땅에 소리없이 선행을 베풀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는 
이들이야말로 세상을 바꾸는 조용한,  그리고 진정한 혁명가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말입니다. 

어떤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접근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겁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환경과 성격에 따라 그 표현 방법이 다르겠지요.

세상을 바꾸는 데 (아니, 변화시키는 데)
체 게바라의 방식이 있을 수도 있겠고
소록도의 두 수녀님이 보여준 방식도 있을 겁니다.

어떤 방식을 취하든 우리들은 그저 그들이 존경스러울 뿐입니다.
43년 동안 나환자촌에서 겸손히 사랑을 실천해 온 마가레트와 마리안  
두 수녀님께 체 게바라 이상의 경외심을 전하고 싶습니다
.